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이후 도시키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R22BPtd8gk)]}}}|| 1931년 [[아이치현]] [[나고야시|나고야]]에서 사진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 졸업 후 [[와세다대학]] 법학부로 편입해 졸업했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 역사상 최초로 [[구제대학]]이 아닌 (1949년 신학제 개편 이후) 신제대학을 졸업한 총리다. 1960년, 불과 29세의 나이에 최연소로 고향 [[아이치현 제3구(중선거구)|아이치현 제3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후 2009년까지 내리 '''16선 49년'''을 지역구를 지켰다. 정계에서는 본래 [[미키 다케오]]의 [[번촌정책연구소|미키파]]에 속해서 미키파의 귀공자라는 별명을 들었을 정도였고 존경하는 정치인을 늘 미키로 꼽았을 정도였다. 미키파가 고모토파로 옮겨갔을때는 고모토 토시오를 지지했지만, 고모토와는 다르게 계파의 정치자금 공헌도가 낮았던 관계로 구두쇠로 불리기도 했다.[* 고모토 도시오는 세계최대규모의 해운회사였던 산코기선의 오너였다. 당연히 자금동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다케시타 노보루]]와는 와세다 대학의 웅변동아리 선후배 사이로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고 하며 다케시타가 총리가 되었을때는 고모토파에서 다케시타파로 갈아탈것을 권유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노 소스케]]가 게이샤 스캔들 및 참의원 선거 대패로 총리직을 사임하자 우노를 옹립했던 다케시타파의 입지가 좁아져 있었다. 그러나 다케시타는 급격한 세대교체를 원하지 않아 젊은 편이지만 선수는 높은 편이었던 가이후를 총리로 옹립하기로 했다. 89년 8월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 하야시 요시로[*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의 아버지다.]와 [[이시하라 신타로]]가 가이후와 함께 출마해 3파전이 되긴 했지만 다케시타파의 지원에 힘입어 가이후가 76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문제는 자민당이 참의원은 과반의석이 아니었다는데 있었다. 참의원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던 일본사회당은 중앙집행위원장인 [[도이 다카코]]를 총리로 지명했고 자민당이 과반의석이던 중의원에서는 가이후가 총리로 지명된 상태였다. 결국 참의원, 중의원 양원위원회가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중의원의 우월이라는 관례에 따라 중의원이 지명한 가이후가 총리로 확정되었다. 이후 모리야마 마유미 환경장관을 관방장관으로 이동시켜 최초의 여성 관방장관을 탄생시켰고 부부동반으로 여기저기의 행사에 나타나는등 여성들을 존중한다는 이미지를 심었다.(물론 이렇게 한데에는 사회당의 도이 다카코의 바람몰이인 도이 붐을 잠재우려는 목적이었지만) 이렇게 하면서 어느정도 지지세를 회복시켰고, 1990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후보자를 많이 내지 못한데다가 공명당, [[민사당]]이 부진[* 하필 공명당과 민사당 일부 간부도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선거전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못했고 거기에다가 [[일본사회당(1945년)|사회당]]과 사회민주연합이 이를 커버할 정도로 후보자를 많이 낸 것도 아니였다.(사회당 149명/사민련 6명, 당선자는 136명/4명) 당연하게도 정권교체에 실패.]하면서 당초에 자민당과 야당연합이 접전을 기록할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싱겁게 자민당이 승리을 거두게 되었다. . 하지만 본래부터 가이후는 자민당내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고 [[리크루트 사건]]으로 일본 국민들의 여론이 격앙된 상황에서 여론의 뭇매를 피하려고 세운 [[바지사장|일종의 간판]]에 불과했다. 비록 리크루트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는 모두 강제로 [[퇴갤]]시키고 내각을 꾸리긴 했지만 사실상 가이후의 뒤에는 다케시타가 있었고 가이후는 다케시타의 눈치만 보는 형편이라고 비난받았다. 심지어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오자와 이치로]]는 '''가이후는 바보다. 차라리 우노가 더 낫다'''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거기에 소선거구제 시행에 반대하며 [[가토 고이치]], [[야마사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소위 YKK 그룹이 대놓고 안티 가이후 운동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안티 운동에도 불구하고 가이후는 여론의 막강한 지지를 받아서 총리직을 유지할수 있었다. [[1990년]] 4월 버블경제가 절정에 다다르자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 주요 골자는 "이 규제가 시행된 시점부터 일본 시중은행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을 정지한다"'''였다.]를 시행했다. 그리고 이는 [[퍼펙트 스톰]]의 역효과로 인해 급격한 [[잃어버린 10년/일본|버블 붕괴]]를 낳아버렸다. 90년 6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노태우]]가 정상회담을, 다음날 [[워싱턴 D.C.]]에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와 노태우가 정상회담을 하면서 일본에서 "이런 탈냉전 무드에서 일본만 소외된게 아니냐"하는 분위기가 나온 적도 있었다. [[http://kr.blog.yahoo.com/yydeokk196/13939|# 만평 출처]] 그래서인지 이후 [[걸프 전쟁]]이 일어났는데 가이후는 [[자위대]]의 평화유지군 파병이나 경제협력에 미, 영에 적극 협력해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총리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고, 91년 통일지방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외교문서 따르면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이 일본 정부에 자위대 파견을 통한 후방 지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헌법 9조 들어 거절한 것이다.[[https://www3.nhk.or.jp/news/html/20211222/k10013398141000.html|#]] 그러나 1991년 11월, 정치개혁법안이 잇달아 부결되자 가이후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루려 했다. 그러나 자민당 의원들이 단체로 '''중의원 해산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켰고(가이후 내림) 여기에 다케시타파 마저 명백하게 해산에 반대하면서 결국 가이후는 총리에서 사퇴하게 된다. 사실 어처구니 없게도 내각의 지지율은 50%가 넘는 상황이어서 다케시타파와 당내 비주류들에게 끌려다닌 결과로 총리직에서 밀려나게 된 셈이었다. 이후 1994년 자민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면서 당시 총재였던 [[고노 요헤이]]가 자민당의 정권복귀를 위해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등의 비자민 야당연합과 연립정권 수립을 합의하자 이에 격하게 반발했다. 국회에서 열린 국가수반 지명선거에서 자민-비자민 야당연합의 연립정권의 국가수반으로 사회당 대표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낙점하자 구 여당 연립정권의 일원이었던 [[신생당]], [[일본신당]]과 연합해 무라야마에 맞서는 국가수반 후보로 나섰지만 기대하던 자민당의 이탈표가 나오지 않아 결선투표에서 패배했다. 이후 자민당을 공식적으로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거쳐 [[신진당]]을 창당해 초대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말이 대표지 사실상 실권은 신진당 초대 간사장이 된 오자와 이치로에게 있었고 신진당 창당 기자회견에서도 질문은 가이후보다 오자와에게 더 많이 집중되었을 정도였다. 자민당에선 간사장 대리였던 [[노나카 히로무]]가 '''총재씩이나 하신 양반이 당을 배신하다니!'''라고 격분하며 역대 총재들의 사진을 전시한 자민당사내 복도에서 '''가이후의 사진을 떼내도록''' 지시했다. 물론 이런 노나카의 감정적 행동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있기는 했다. 그러다가 신진당이 분당되자 무소속으로 1년여간 지내다가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에 참여한 [[자유당(일본, 1998년)|자유당]]에 입당했다. 2000년에는 자유당이 분열되자 자민당과의 연립정권 참여를 주장하는 측이 창당한 보수당으로 옮겼다. 보수당이 [[보수신당]]으로 개편후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승리한후 보수신당이 자민당에 흡수통합되면서 다시 자민당으로 복당하게 되었다. 당시 간사장이었던 [[아베 신조]]는 가이후의 복당을 크게 환영하면서 떼내어진 가이후의 사진을 다시 역대 총재 사진들 가운데 전시하게 했다. 정계은퇴 이야기가 오갔지만 2009년 중의원 선거에 '''50년 의정 기록'''을 세우고 싶어 출마했다가 지역구에서 낙선했고 73세 이상은 비례대표로 중복출마가 안된다는 규정에 따라 비례대표 구제도 안되어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사후 생존 최고령 자민당 전 총재 타이틀을 이어받았다. 총리대신으로는 7세 연상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생존 최고령이라 2위에 있는 중이었다가 2022년 1월 9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했고, 한국에선 14일 보도로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